이기적 유전자, 최재천 교수

이번 글에서는 유튜브 최재천의 아마존 채널에서 소개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에서 말한 유전자로 보는 인간의 삶에 대해 정리해 본다.

⟨이기적 유전자⟩ 최재천 교수 책 추천사

한 권의 책 때문에 인생관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내게는 『이기적 유전자』가 바로 그런 책이다. 삶에 대한 회의로 밤을 지새우는 젊음에게, 그리고 평생 삶에 대한 회의를 품고 살면서도 이렇다 할 답을 얻지 못한 지성에게 『이기적 유전자』를 권한다. 일단 붙들면 밤을 지새울 것이다.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

답이 없다. 그냥 사는 거다. 과학적으로 삶이라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을 물질로 설명할 수 있는가. 못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내가 태어난 이유도 있을 것 같고, 내가 살아야 되는 어떤 목적이라는 게 있어야 될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없는 게 맞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기적인 유전자⟩ 책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전자로 본 삶의 의미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에 입학을 해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다. 사회 생물학이라는 과목이 있어서 흥분이 되었다. 관심사인 사회 문제를 생물학적으로 분석해보는 학문인 것 같아서 들뜬 마음으로 수강 신청을 하고 들었다. ‘사회생물학’ 이론의 창시자인 월슨 교수님이었다. 인간을 포함한 다른 동문의 사회적 행동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이론이다.

첫 수업에 들어가서 강의를 듣고 마음을 정했다. ‘사회생물학이란 말하자면 일개미들이 왜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다 하느냐. 그런 걸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보면 됩니다.’ 얘기를 듣는 순간 ‘그래. 나는 이런 걸 연구하고 살아야겠어.” 전공을 그 순간에 결정을 했다. 그 수업에서 ⟨Sociobiology⟩ 와 부교재로 읽었던 책이 ⟨이기적 유전자⟩ 였다.

두 권의 책을 사서 밤새도록 읽고, 새벽녘에 책장을 덮었는데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었던 삶에 대한 그 많은 의문과 질문들이 그 책에서 도킨스가 선사해 주는 ‘유전자 렌즈’를 끼고 보니까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야 되느냐 하는 게 보였다.

그날 이후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유전자의 관점에서 본다. 어떤 문제가 주어지더라도 ‘모든 문제를 진화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관된 잣대가 하나 생긴 것이다. 그 분석이 언제나 옳을 필요는 없다. 다만 나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일관된 대답과 해답을 주니까 세상이 내가 생각한 일관된 기준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기적인 유전자⟩ 를 읽은 후 삶의 회의감이 드는 사람들

수업 시간 또는 강연 시간에 유전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분석하는 강의를 하고 나면, 수업이 끝나고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다. 몇몇 학생들은 찾아와서 흐느끼면서 운다. “교수님의 설명을 듣다 보면 도대체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유전자가 나를 만들었고. 유전자의 임무를 내가 지금 수행하고 있는 거고. 나는 어차피 한줌 흙으로 다시 돌아갈 거고. 내가 아등바등 힘들게 살아갈 이유가 뭐가 있나.” 그런 얘기를 하더라.

심지어는 이 책, 읽지 말아라 ⟨이기적인 유전자⟩를 잘못 읽으면 허무주의에 빠지고, 잘못하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심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얘기들을 글로도 쓴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

2009년에 옥스포드에 가서 리처드 도킨스를 만나서 질문을 했다.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고 삶의 회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아?” 리처드 도킨스가 대답했다. “안올리가 있냐. 부지기수로 많이 온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하냐?” 최채천 교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나를 찾아와서 이런 상담을 하는 학생들이나 또는 독자들에게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해 봐라. 그럼 이상하게 어느 날 마음이 평안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삶의 의미라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 어쨌든 나는 지금 살고 있고. 나에게 주어진 여러 가능성을 신나게 검사해 보면서 후세에 내 유전자를 남길 수 있으면 그것도 의미가 있는 걸 테고. 그 이후로 나의 삶은 참 평온했다.” 라고 얘기를 한다. 그랬더니 도킨스가 “나도 그 대답 써먹어도 될까?” 하더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이상한 마음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러면 거짓말이다.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한 두어 번 정도 있었다. 하지만 진화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 시작한 이후에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럴 이유조차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차피 삶은 흘러가는 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는 걸 알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했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본인의 책 ⟨다윈 지능⟩의 제일 마지막 챕터에 [자유 의지의 출현]이라는 제목으로 우리 인간에게 자유 의지라는 건 어떻게 탄생했을까? 다른 동물들은 절대로 자유 의지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침팬지가 책을 쓰는 동물은 아니지 않느냐. 지구에 존재하는 동물들 중에서 호모사피엔스가 유일하게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나는 어디로 흘러 갈 것인가’ 그 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의 뇌 진화 과정으로 보면, 호모사피엔스의 단계에 도달하면서 뇌가 자기가 자기를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돼버린 것 같다. 하등 동물과 고등 동물 이런 식으로 나눠서는 안 되겠지만 진화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을 것 같은 작은 생물에서 보면 외부로부터 받은 자극에 반응하며 뜨거우면 도망가고, 먹을 게 있으면 먹고, 이런 식으로 살 것이다.

생물의 진화에서는 신경세포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중앙에 그런 걸 판단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내는 거다. 그것을 갱글리아라고 부른다. 신경세포 뭉치들이 생겨 난다. 그게 가장 크게 뭉친 것이 뇌가 된 것이다. 뇌는 몸 안에 모든 들어오는 자극들을 다 한 곳에서 모아서 분석을 해서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하고 결정을 내린다.

뇌가 계속 진화를 하다보니까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만 분석하는 게 아니라 별의별 쓸데없는 것까지 다 끄집어 내가지고 생각하고 분석한다.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일을 생각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지?’ ‘우산을 안 가지고 나왔는데 비 올 것 같은데?’ 비는 오지 않는데 걱정을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재미 없었을까?

만약에 우리 인간의 뇌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을 분석하고, 그것에 대한 대응책을 만들어서 대응시키고 그걸로 끝났으면 재미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처럼 쓸데없는 걸 걱정하고 괜한 상상을 하고 사실은 그게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모습일 것이다. 당연한 결과이고 받아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고찰이 꼭 필요할까?

“과학적으로 보면 삶의 의미가 없다” 물리학자가 보면 충분히 그럴 것 같다. 그런데 생물학자가 되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똑같은 유전자 조합을 갖고 있는데 생물은 다른 짓을 한다.

완벽한 예가 될 수는 없지만 가장 근접한 예는 일란성 쌍둥이이다. 일란성 쌍둥이 둘은 100% 똑같은 유전자 조합을 갖고 있는 두 생명체이다. 근데 그 두 생명체가 매순간 똑같은 일을 하느냐? 아니다. 숨쉬는 속도도 다르고 가는 방향도 다르다. 일란성 쌍둥이를 친구로 두어본 사람들은 다 안다. 어렸을 때는 되게 비슷한 것 같더니 청년이 되고 이러면 약간씩 달라진다.

생물이라는 건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존재이다. 물론 물리학이나 화학이 언젠가는 다 설명해낼지도 모르지만, 생물학에서 바라보는 생명 현상은 많은 가능성을 허용한다. 이걸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학은 그동안 우리 인간의 삶의 의미를 설명하는데 굉장한 기여를 한 학문이다. 그런데 과학과 철학이 등장했다. 과학과 철학이 기존에 도전한 부분들이 많다. 과학적으로 분명한 사실들을 끌고 들어와서 근본부터 흔들어버린 일들이 많이 벌어진 것이다. 과학과 철학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한 사람의 대부분이 물리학 공부를 했다.

윌슨 교수님의 통섭을 읽어 봐도 결국 모든 것은 물리학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가장 작은 단위에서 출발해서 설명을 이어붙어야 된다. 물리학자들이 바라보는 그 수준에서 출발하는 거다.

근데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은퇴 이후에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마음 속에 있는 소망이지만 할 수만 있다면 생물 철학의 기초를 만들어보고 싶다. 가끔 강연에서 이런 퍼포먼스를 한다. 생명에 대한 설명을 하다가 미리 준비한 그릇을 객석에 쭉 돌리면서 ‘간 세포 하나씩들 떼어서 여기에 넣어주세요’ 청중을 한 바퀴 쭉 돌아서 다시 돌아오면 ‘자, 간 세포를 잔뜩 모으면 뭐가 되죠?’ 물으면 답이 없다.

이번에는 ‘심장 세포 하나씩 떼어 주세요’ 신장 세포를 잔뜩 모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신장 세포들이 모이면 자기들이 알아서 박동을 만들어낸다. 영어로 이것을 페이스 메이킹이라고 한다. 심장의 한 부분에서 박동이 만들어져서 그게 심장 근육을 움직이고 피를 온몸으로 보낸다. 이게 심장 세포 하나씩 떼어 놓으면 박동이 발생하는 건 전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데 모아 놓으면 그들끼리 알아서 박동이라는 걸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 그 공동체 안에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간세포를 아무리 많이 모아 놓아도 그 간세포 속에서 뭐가 만들어지는 건 없다. 하지만 심장 세포는 잔뜩 모아 놓으면 그들끼리 관계 속에서 박동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생물학에서 얘기하는 창발 현상이다. 아래 단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속성이 그것들을 다 모아 놓으면 다음 단계로 올라갈 때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속성이 나타나는 것들, 똑같이 세포를 한 30조 개씩 다 갖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비슷비슷하게 생긴 세포 30조개를 만들어서 ‘최재천’을 만들었다. 그랬더니 ‘최재천’은 이쪽에 앉아서 떠들고 두 분은 카메라 뒤에서 나를 찍고 있다. 이런 차이가 왜 만들어질까? 이건 물리나 화학을 기반에 두고 설명하는 것 이상으로 뭔가가 그 위에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생물 철학은 물리 철학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 일을 하다 보면 인문학자들이 생각하는 삶의 의미가 전혀 의미없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물리학이나 화학이나 자연과학은 분석할 수 없는 그런 부분이 실제로 생명계에는 존재하고 그걸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생물학일 것이다. 더 좁혀서 얘기하면 생물 철학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게 나의 생애의 마지막 부분에 꼭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이다.

※ 출저 :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유전자로 보는 삶, 최재천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전지적 관찰자 시점, 최재천의 아마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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