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8장 작품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8장은 브링리가 입사 4년 차에 접어든 시기이다. 그는 처음으로 신입 훈련 임무를 맡는다. 5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반백의 머리에 각진 안경을 쓴 남자 조셉과 브링리는 아메리카 전시관으로 향한다. 이번 장에서는 아메리카 전시관을 둘러보게 된다.

예술품을 지키는 일은 보통 혼자하지만 그레이트홀은 예외인 곳에 속한다. 이곳 C구역에서는 세 가지일을 담당하는데 테이블, 포인트, 박스라고 부른다. 테이블은 가방 검사를 뜻하고, 포인트는 표를 받는 일이며, 박스는 휴대품 및 코트 보관소이다.

브링리는 포인트의 일을 선호하는데, 포인트는 미술관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사교적인 일터라고 말한다. 두 명의 경비원이 일부러 좁게 만들어 놓은 입구 양옆에 가까이 마주보고 서서 온종일 수다를 떨 수 있는데, 놀라운 것은 여덟 시간 동안이나 수다를 떨고도 상대방 이름을 모르고 헤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경비원이 너무 많고, 근무 구역이 무작위로 배정되기 때문에 일대일 대화를 수백 번 한 다음에도 딱히 본인 소개를 하거나 인사를 나눠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경비원들도 꽤 있다고. 이런 대화에서 브링리가 노력하는 대화 유지 방법이 돋보인다.

요즘은 이런 대화에서 내 몫을 다하고자 의욕을 가지고 노력한다. 그리고 서서히 대화를 유지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날마다 “산타나가 요즘 꽤 괜찮죠?” 같은 말을 건네기 위해 평소보다 야구 뉴스를 신경 써서 확인한다. 정치, 음악, 책, 직장 이야기를 나누고 특히 다들 즐겨하는 직장에 관한 불평을 할 때면 약간 과장된 표현을 하는 것도 스스로에게 허락한다. 바로 그런 불평이야말로 유대감을 형성하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중 어느 것도 내 성격 자체를 왜곡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만의 사고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주파수대로 들어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최고의 대화 요령은 질문, 그중에서도 기나긴 대답이 필요한 열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기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도록 만드는 건 아주 만족스러운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받으면 처음에는 놀라지만 일단 대답하기 시작하면 할 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내 무지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몰도바요? 믿지 못하겠지만 내가 몰도바에 관해 하나도 아는 게 없다는 거 알아요?” 라고 말한다. 상대방은 내가 몰도바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믿는다. 경비원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의 지식에 난 커다란 구멍들을 잘 참아낸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181~182.p

8장 끝무렵, 형을 떠나보낸 후 한동안 그저 가만히 서 있고 싶었던 브링리에게 다시 일상의 리듬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동료 경비원들 또는 관람객과 나눈 짧은 대화가 다시 세상의 흐름으로 이끌어 줬다고 고백한다. 소통의 힘이란・・・ 우리는 인간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받지만, 그 상처를 회복 시키는 것 역시 인간이다. 인간을 통해 위로 받는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고립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머리에 새긴다.

동료 경비원들이나 관람객들과 나눈 짧은 소통에서 찾기 시작한 의미들은 나를 놀라게 한다. 부탁을 하고, 답을 하고, 감사 인사를 건네고, 환영의 뜻을 전하고・・・ 그 모든 소통에는 내가 세상의 흐름에 다시 발맞출 수 있도록 돕는 격려의 리듬이 깃들어 있다. 비탄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리듬을 상실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잃고 나면 삶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한동안 그 구멍 안에 몸을 움츠리고 들어가 있게 된다.

여기서 일하면서 나는 메트라는 웅장한 대성당과 나의 구멍을 하나로 융합시켜 일상의 리듬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상의 리듬은 다시 찾아왔고 그것은 꽤나 유혹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가 영원히 숨을 죽이고 외롭게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1.p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7장 작품

8장 – 푸른색 근무복 아래의 비밀스러운 자아들

1. 미합중국 제2은행 건물 정면

우리는 유리로 덮인 조각 광장으로 나온다. 벽 한 면이 그리스 신전 양식을 띠는 2층 높이의 파사드로 되어 있다. “훈련받을 때 저 파사드 얘기 들었어요?” 내가 물었다. “원래는 1820년대에 지어진 월 스트리트의 은행이었어요. 지어진 지 백 년 만에 해체해서 여기다 다시 지었죠. 월 스트리트에 관해서는 얼마나 알아요?” 나는 선생님 역할을 진심으로 즐기면서 빠른 속도로 신나서 말한다. 먼저 월 스트리트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벽’에 관해 이야기한다. 식민지 시절 아프리카인들의 강제 노역으로 짓고,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이 영국과 아메리카 원주민인 델라웨어족을 막기 위한 장벽으로 사용했다. (171.p)

Facade of the Second Branch Bank of the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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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매사추세츠 힝햄의 올드십 교회에서 영감을 받은 예배당 갤러리

코너를 돌아 17세기 매사추세츠의 올드십 교회 예배당에서 영감을 받은 방으로 향한다. 조셉은 조선공들의 지혜를 빌어지어진 이 구조물의 아름답고 두꺼운 목재 서까래들을 올려다본다. (173.p)

Gallery 713 The American Wing

3. 하트 하우스의 방

잠시 후 우리는 천장이 낮은 ‘하트 하우스의 방’으로 들어간다. 이 방도 17세기 매사추세츠에서 지어진 건물의 일부로, 철거될 운명에 처하자 미술관에서 이 방만 도려내듯 해서 옮겨왔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었나요?” 조셉은 밀실 공포증을 느끼게 할 만큼 좁고 어둡지만 매력이 넘치는 방을 둘러보며 묻는다.

“부자들이었어요. 적어도 꽤 잘사는 사람들이요.” 나는 당시에는 사치재였던 납땜으로 유리를 이어 붙여 만든 작은 창문들을 가리키며 말한다. (173~174.p)

Room from the Hart House
갤러리 709 에 설치된 하트 하우스의 방은 아메리칸 윙의 가장 초기 시대 방입니다. 건축학적 요소는 17세기 뉴잉글랜드 인테리어의 전형이며, 가구는 17세기 후반 매사추세츠산 가구의 훌륭한 예입니다. 영국의 조이너와 터너에 의해 북유럽과 영국의 후기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디자인이 혼합되어 있으며 식민지에 도입된 공예 기법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방은 매사추세츠주 입스위치에 있는 사무엘(1645~1725)과 사라 노턴(1647~1727) 하트의 집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1세대 뉴잉글랜드 출신인 사무엘 하트(Samuel Hart)는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태닝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은 1678년 하트의 결혼 후 2년 이내에 완성되었습니다.

4. 개즈비스 호텔 연화장 (알렉산드리아 무도회장)

5. 조지 워싱턴

6.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

우리는 조지 워싱턴이 마지막 생일 파티를 했던 버지니아의 호텔 안에 서 있다. 조지에 관해서는 조셉에게 해줄 말이 많다. 길버트 스튜어트가 그린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유명한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는데 조셉은 앞으로 1달러 지폐를 꺼내 들고 그림과 비교하며 눈을 게슴츠레 뜨는 관람객을 적기 않게 만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그에게 ⟨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을 테고 조셉은 그들을 실망시켜야 할 것이다. 옥외 광고판처럼 커다란 그 그림은 건물을 보수할 때 옮겨올 수가 없어서 현재 관람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메리카 전시관의 흥미로운 특징들을 눈여겨보라고 조언한다. 은발 가발을 쓴 남자가 나오는 초상화는 하나도 빠짐없이 조지 워싱턴이라고 착각하는 관람객이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초상화는 엄청나게 많다. (175~176.p)

George Washington
Gibbs-Channing-Avery 초상화라고 불리는 이 워싱턴 대통령의 초상화는 버전 그룹으로 알려진 18개의 유사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유형의 첫 번째 유형은 아마도 실물로 그린 다음 다른 모든 것을 복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는 런던 상인이자 워싱턴의 절친한 친구인 사무엘 본(Samuel Vaughan)의 소유였습니다. 렘브란트 피일(Rembrandt Peale)에 따르면 1795년에 그린 스튜어트의 원본 초상화는 나중에 필라델피아의 조셉 해리슨(Joseph Harrison)이 구입했습니다. 해리슨의 컬렉션에 있는 동안 렘브란트 피일은 이를 여러 번 복사했습니다. 현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버전은 최초이자 최고의 복제품 중 하나로 여겨지며 스튜어트의 절친한 친구인 조지 깁스 대령에게 팔렸고 이후 깁스 가문의 후손으로 내려왔습니다.

Gallery 719 Alexandria Ballroom
1924년 아메리칸 윙(American Wing)이 개장한 이래 이 크고 인상적인 방은 갤러리 719 에 설치된 알렉산드리아 볼룸(Alexandria Ballroom)으로 불렸습니다 . 공공 집회와 우아한 무도회를 주최할 목적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원래 1792년 버지니아 주 알렉산드리아에 지어진 시티 호텔 의 2층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초기 소유주 중 한 명인 John Gadsby(1766-1844)의 지시에 따라 호텔과 인접한 선술집은 초기 미국 대통령, 정치인, 외국 고위 인사를 포함하여 많은 주목할만한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개즈비 태번(Gadsby’s Tavern)의 무도회장은 알려진 바와 같이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개최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그의 마지막 두 생일(1798년과 1799년)을 이 방에서 축하했으며, 1801년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취임 연회가 이곳에서 열렸습니다. 방에는 음악가의 갤러리에 전시된 것과 같은 Windsor 옆 의자가 드물게 가구가 비치되어 있거나 벽을 따라 단순한 초기 연방 스타일 의자가 늘어서 있습니다. 오늘날 이곳은 같은 시대의 그림과 함께 박물관의 18세기 미국 가구 컬렉션의 하이라이트를 전시하는 갤러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Washington Crossing the Delaware
1776년 12월 25일 트렌턴에서 헤센군에 대한 워싱턴의 공격에 대한 Leutze의 묘사는 미국과 독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Leutze는 1849년에 이 주제에 대한 첫 번째 버전을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1850년에 그의 스튜디오에서 화재로 손상되었으며, 브레멘 쿤스트할레(Bremen Kunsthalle)에 의해 복원 및 인수되었지만 1942년 폭격으로 다시 파괴되었습니다. 1850년에 로이츠(Leutze)는 이 버전의 작품을 시작했습니다. 이 주제는 1851년 10월 뉴욕에서 전시되었습니다. 이 전시에서 마샬 오 로버츠(Marshall O. Roberts)는 당시 엄청난 금액인 $10,000에 캔버스를 구입했습니다. 1853년에 노들러(M. Knoedler)는 그것의 판화를 출판했습니다. 다른 예술가들의 사본과 마찬가지로 그림에 대한 많은 연구가 존재합니다.

7. 치펜데일 스타일 의자 (마호가니 사이드 체어)

호텔을 옮겨놓은 이 방 역시 보통 상상하는 것보다 작은데 고급 마호가니 가구로 가득하다. 적갈색 목재가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보인다. 슬슬 걸어서 치펜데일 스타일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테렌스가 가르쳐준 것이 생각난다. 마호가니 목재는 카브리 연안 지역, 아마도 벨리즈에서 수확되었을 확률이 높은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노예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테렌스는 자신이 아마도 카리브 연안으로 납치되어 온 마지막 아프리카인들의 후손일 것이라고 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노예 무역 초창기에 납치된 사람들은 보통 가족을 꾸려 아이를 낳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착취당하다가 중간 항로를 거쳐 끌려온 더 많은 아프리카인들로 대체되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테렌스는 함께 바라보고 있던 의자의 제작일을 확인했다. 영국 제품을 그대로 모방한 모델이었다. “1760년? 아이고・・・.” 그가 심각하게 말했다. “좋은 징조가 아니네.” (176~177.p)

Side chair
토마스 치펜테일(Thomas Chippendale)의 “The Gentleman and Cabinet-Maker’s Director”(1762년판)에 등장하는 모티프를 종합한 이 의자의 등판 디자인은 필라델피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8. 생일이벤트 번호 50 (생일인 것-50번)

에밀리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2011년에 열린 직원 작품 전시회에 출품한 것이다. 몇 년에 한 번씩 메트는 일반 대중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전시회를 열고 직원들이 작품을 출품할 수 있도록 하는데 경비원들도 꽤 많이 참여한다. (중략) 에밀리는 보지 못하고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을 제작했다. 거의 천장까지 닿는 커다란 생일 케이트로 나무, 철망, 스펀지, 노끈, 병뚜껑, 코르크 마개, 조화 그리고 세탁소에서 유니폼을 찾을 때 덮여 오는 비닐백을 로프처럼 길게 땋은 재료들도 지어진 것이었다. 케이크 맨 아래층에는 구식 브라운관 텔레비전도 있었는데 에밀리가 중량 운동하는 모습을 찍은 ⟨덤벨컬스⟩라는 비디오가 틀어져 있었다. 케이크 맨 꼭대기를 장식한 숫자 ’50’이 이케이크가 무엇을 축하하는 것인지 알려줬다. (188~189.p)

Birthday Thing Number 50
작가 소장 – 링크를 클릭하면 이미지를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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