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12장은 브링리의 상상력에 불을 지핀 기획전 두 가지가 소개된다.
하나는 예술계에서 가장 크게 이름을 날린 사람 중 한 명인 미켈란젤로.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예술가라 생각하지도 않았을지도 모를 무명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아 놓은 전시이다.
브링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는 16세기 기독교 세계의 중심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20세기 한 흑인 공동체가 모여 사는 앨라배마주 시골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번 글에서는 미켈란젤로가 스승으로 여긴 작가들의 소묘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실, 로마 시스티나 예배당의 분위기를 내려고 위대한 천장화를 머리 위에 재현해 놓은 전시실, 길게 펼쳐진 거장의 후기 커리어를 커버하는 전시실, 미켈란젤로가 현대의 기준으로 노인이 된 후 작품들이 있는 전시실에서 만난 작품을 만나러 가 보자.
메트에서 열린 전시는 좀 더 아담한 규모지만 내게는 거장의 작품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이다. 전시물은 미켈란젤로의 70년 커리어 전반에 걸친 133점의 소묘 작품들로, 대부분이 아무에게도 보여줄 의도가 없었던 습작들이다. 전시는 ⟨미켈란젤로” 신이 내린 소묘 화가이자 디자이너⟩ 라는 제목을 내걸었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그 주인공이 하나의 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예술사 최고의 거장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날마다 그날 해야 할 일을 마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데 더없이 전념했기 때문이다.
280.p
미켈란젤로는 아마 표현하기 가장 어려운 대상과 사랑에 빠졌던 듯하다. 바로 약 6백 개의 근육과 약 2백 개의 뼈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 말이다. 이 전시실에는 그가 자신의 눈과 손과 두뇌에 의지해서 생명력을 불어넣은 인간의 몸이 되었다.
283.p
종이 위의 무엇 하나 그냥 그린 건 없다. 한 획 한 획마다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고자 하는 에너지와 야심과 헌신이 깃들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빈 종이 한 장만 있으면 모든 근심을 잊고 신의 힘을 바쳐 주어진 과제를 해냈고, 씁쓸한 불평 따위는 일이 끝난 후에나 하는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어려운 일을 해내는데 이보다 나은 방법이 또 있을까?
287.p
12장 – 무지개 모양을 여러번 그리면서
1.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만일 어떻게든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미켈란젤로가 그랬듯이 높게 쌓아 올린 비계 위에 서서 턱을 치켜들고 설 수 있다면 거장이 하루에 얼마만큼의 작업을 했는지 정확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아침 미켈란젤로와 그의 조수들은 새로 바른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날 완성해야 할 부분에 대한 밑작업을 했다. 이것을 이탈리아어로 ‘하루의 일’이라는 뜻의 조르나타라고 하는데 시스타나 예배당의 천장화는 사실 이렇게 작고 불규칙한 모양의 작은 성취들이 경계선이 거의 보이지 않은 모자이크처럼 모여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아담은 조르나타 네 개, 팔을 뻗고 있는 신도 조르나타 네 개, 조각들을 세어보면 미켈란젤로가 붓과 물감통과 모래, 회반죽 자루를 가지고 흙손으로 그 높은 곳에서 570일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80.p)
4년의 작업 끝에 천장화가 완성되자 “온 세상이 그 작품을 보려고 몰려오는 소리가 들린다”라고 그의 동시대인은 전하지만 미켈란젤로는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그동안 그려오던 예배당 천장화 작업을 끝냈습니다. 교황이 매우 만족했습니다”라고 그의 아버지에게 편지로 전했을 뿐이다. 그런 다음 덧붙였다. “다른 일들은 바랐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건 제가 시대를 잘못 타고 난 때문인 듯합니다. 지금은 제가 하는 예술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시대예요.”
오늘 날 우리는 이 “호의적이지 않은” 시대를 하이 르네상스 혹은 전성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287.p)
2. 마사초의 성 베드로와 팔 연구(앞면): 팔목과 이어진 손뼈, 남성의 몸통, 오른팔(뒷면)
소묘화에 다가서면서 그 작품을 선배 거장 마사초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10대 미켈란젤로의 시선을 상상해보려고 노력한다. 이 소묘는 마사초의 성 베드로 프레스코화를 붉은 초크와 펜, 갈색 잉크로 베낀 작품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에게 심한 매질을 당했다. 부오나로티 가문은 빈털터리였지만 귀족이었고 그의 아버지 로도비코는 아들이 손을 쓰는 일을 하는 것을 몹시 괴로워했다. 그물처럼 교차하는 선들로 세심하게 공을 들여 음영을 표현한 작품을 보면서 로도비코가 한 가지 면에서는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업은 육체노동이었다. 반복적이고 지루하며 몸을 쓰는 노동. 숙련이 가능한 노동인 것은 확실하지만 지름길도 없고, 인내심을 가지고 한 획 한 획 긋는 것 말고는 일을 진척시킬 다른 방법이 전혀 없는 겸허한 작업인 것이다.
나는 작업을 하는 젊은 예술가의 손길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까지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사초의 성인을 베껴 그린 후, 미묘한 수정을 가미한 미켈란젤로는 베드로의 뻗은 손을 다시 그렸다. 이번에는 90도를 돌려서 위에서 보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며 그린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개념적 도약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조각가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해가 된다. 3차원적 예술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소묘 작품은 받침대 위에 전시되어 있어서 주변을 돌아 그 뒷면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뒤로 돌아가 보니 뒷면에 손을 하나 더 그려놓은 것이 보인다. 이 손은 살과 근육을 모두 발라낸 오싹한 느낌의 해골이다. 어쩌면 그는 성 베드로를 눈으로 해부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피렌체 산토 그피리토의 병원에서 실제 시체를 해부할 때 이 종이를 재활용해서 그렸는지도 모른다. 종이를 낭비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나는 내 손을 한참 바라보면서 이 젊은 예술가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프로젝트의 규모에 혀를 내두른다. 그가 사물을 얼마나 정확히, 얼마나 깊은 곳까지 보고 싶어 했는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281~282.p)
Male Figure after Masaccio, Arm Studies (recto)
이 그림은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에 있는 브란카치 아카펠라에 있는 마사치오의 헌금에 나오는 성 베드로의 모습 을 미켈란젤로가 복사한 것입니다 . 이것은 그가 피렌체의 옛 거장인 조토(Giotto)와 마사치오(Masaccio)의 작품을 약간 변형하여 복사한 일련의 초기 그림의 일부입니다.
이 시트의 그림은 펜으로 그려졌지만 그림 아래에는 빨간색 분필로 작성된 예비 그림이 보입니다. 빨간색 분필은 레오나르도가 그림에 처음 사용했습니다. 시트 뒷면에는 해부학적 연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 소네트 “조반니 디 프토이아에게”와 시스티나 성당 천장 벽화를 그리는 자신의 캐리커쳐
실은 로마 시스티나 예배당의 분위기를 내려고 위대한 천장화를 머리 위에 재현해 놓은 전시실이다. 몇 분 후 벌떼처럼 몰려든 순례자들이 주변에 걸린 그림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난친 후 곧바로 카메라를 위쪽으로 치켜든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비슷한 자세로 붓을 위로 쳐든 스스로를 미켈란젤로가 끄적거리듯 그린 그림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 나는 혼자 쿡쿡 웃는다. 이 자화상에서 그는 고개를 90도 각도로 젖히고 팔을 12시 방향으로 뻗고 있다. 적어도 570일간 그런 자세로 일했을 것이다. 그 낙서 옆에 그는 척추, 엉덩이, 물감 튄 얼굴, 그리고 두개골이라는 ‘관’ 안에 갇힌 뇌 상태에 대해 불평하는 소네트를 적어두었다. 소네트는 들떠서 사진을 찍어대는 전시실의 관람객들을 놀라게 할 만한 말로 끝을 맺는다. “이곳은 만족스럽지 않다. 나는 화가가 아니다.” (284.p)
James M. Saslow on Sensuality and Spirituality in Michelangelo’s Poetry
4. 리비아인 예언자 연구(앞면)
붉은 초크로 그린 이 소묘는 그가 그려낸 수 천 점 중 하나일 것이다. 내 눈앞에는 ‘리비아인 시빌’이라고 부르는 인물이 놓여 있다. 미켈란젤로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누드모델이다. 그 남자는 아마도 예술을 하려는 학생이나 조수였을 것이다. 시빌은 여자 예언가 혹은 점쟁이로 알려진 인물이지만 미켈란젤로가 관심을 가졌던 건 대개는 남성의 몸이었다. 그는 젊은 남성 모델에게 몸을 나선형으로 꼬는 어려운 포즈를 취해달라고 주문했을 것이다. 자신도 어려운 자세로 작업을 해야 해서 고생을 많이 한 그가 모델들이 그런 자세를 취하느라 쥐가 나고 여기저기 결리는 것에 대해 공감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나도 슬쩍 그 자세를 취해보지만 사람들의 눈이 신경 쓰여 그냥 몸을 스트레칭하는 척했다. 그런 다음, 그림들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기울인다. (285.p)
Studies for the Libyan Sibyl (recto); Studies for the Libyan Sibyl and a small Sketch for a Seated Figure (verso)
인생 연구를 면밀히 관찰한 이 양면 시트는 북미 미켈란젤로의 가장 장엄한 그림으로, 1924년 8월 8일 메트로 폴리탄에서 구입했습니다. (이 구입품은 1924년 6월 9일 박물관 구입 위원회에서 투표로 결정됨). 이는 저명한 화가 John Singer Sargent와 이전 소유자인 Aureliano de Beruete의 미망인과의 협상 덕분입니다.
메트로폴리탄 시트의 유명한 직사각형 면에 대한 실물 크기보다 훨씬 작은 이 연구들은 분명히 시스티나 천장의 북동쪽 끝에 프레스코화로 그려진 기념비적인 왕좌에 오른 여성 인물인 리비아 시빌의 디자인을 준비하기 위해 이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젊은 남성 조수로부터 이루어졌습니다.
리비아 시빌은 금고의 북쪽 부분에 프레스코화된 마지막 인물로 실물 크기의 약 3배 (프레스코화된 이 부분의 전체 면적은 가로 4.54 미터, 세로 3.80 미터) 크기로 집행되었으며, 그녀는 힘이 센 어깨와 팔을 제외하고는 옷을 입고 있으며, 정교하게 짜여진 코퍼쳐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프레스코화 속에서 그녀의 복잡한 포즈는 분명히 수많은 그림으로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그녀가 왕좌에서 물러나는 체포된 움직임을 연기하는 동시에, 그녀가 닫으려고 하는 엄청난 예언의 공개된 책을 들고 있습니다.
5. 피렌체 요새화 연구: 프라토 디 오그니산티의 세르페의 탑(앞면)
“제가 이해한 바로는.” 나는 질문을 하는 관람객에게 말한다. “이 그림은 피렌체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미켈란젤로가 그린 것인 듯합니다. 게처럼 보이는 뾰족뾰족한 구조물은 대포 공격을 위한 보루와 성곽이에요.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설계도만 그린 게 아니라 대규모 노무자 집단을 이끌라는 임무도 받았습니다. 그중 일부는 미켈란젤로와 함께 대리석을 채굴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성곽을 짓는 일을 함께하게 된 것이죠.” (288.p)
Study of Fortification for the Porta al Prato of Ognissanti
1529년 첫 몇 달 동안 메디치 가문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제국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가족이 권력을 회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 피렌체 전역에 퍼졌다. 몇 년 전. 인민 정부는 1526년 메디치가 치하에서 시작했지만 한 번도 완료되지 않은 방어 작업을 완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민병대 9인방”으로 알려진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미켈란젤로가 그 위원회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그는 “요새의 총독과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고 동료 시민들의 존경에 힘입어 미켈란젤로는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일련의 제안을 작성했습니다. 그러나 복잡성으로 인해 구현되지 않았거나 극히 일부만 구현되었으며, 구축된 모든 것이 이제 파괴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계획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카사 부오나로티(Casa Buonarroti)에 있는 16개의 특별한 그림에 대한 연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그림은 20세기 초에 이미 관심을 끌었지만 그 중요성은 Tolnay와 Barocchi에 의해 완전히 밝혀졌습니다. 최근에는 Pietro Marani와 Amelio Fara가 제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그림의 독창성을 식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인할 수 없는 전술적, 전략적 혁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건축물과 완전히 일치하는 역동적인 특성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없었던 이러한 디자인의 효과를 인식하는 것이 이 시트의 미학적 가치를 손상시키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한 예는 의사소통의 힘과 아름다움으로 인해 학자들 사이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아온 13A입니다. Paola Barocchi는 이를 “주변에 자신만의 공간 라인을 감동시키는 광대한 에너지로 열리고 터지는 발명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6. 성 베드로 성당 돔 연구(앞면)
교대 후에는 미켈란젤로가 현대의 기준으로도 노인이 된 후 작품들이 있는 전시실에 배치된다. 그가 쓴 다음과 같은 시들로 미루어보건대 그는 늙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은 게 분명하다. “끊임없이 갈아대는 줄은 / 이 늙은이의 가죽을 쭈글거리게 만들고 닳아 없애어간다 / 내 불쌍하고 병든 영혼!” 70대에 그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건설의 총 지휘자로 임명 받았다. 이 영예는 “미켈란젤로의 의지에 완전히 반해서 주어졌고, 그는 엄청나게 당황했다”고 친구 조르조 바사리가 전한 걸 보면 그는 이 일도 좋아하지 않았던 듯하다. 사실 그보다 더 복잡하고 옹색한 프로젝트를 상상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 일을 해내려면 교황청 내의 정치적 암투를 헤쳐나가야 했을 뿐 아니라 두 명의 선임 건축가들이 남긴 작업 제한도 극복해야만 했다. 그는 17년 여생을 성 베드로 성당 건축에 바쳤다.
그가 대성당의 거대한 돔 지붕을 그린 가로세로 25센티미터 가량의 종이를 들여다본다. 로마의 지붕들 위로 높이 솟아오른 돔을 짓는 것은 초인간적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고, 바로 그래서 우리가 미켈란젤로라는 인물이 초인간적인 능력을 지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소박한 그림에서 그는 그저 무지개 모양을 거듭해 그리면서 마음에 드는 곡선을 찾으려 하고 있다. 아무리 위대하다 칭송을 받는 그일지라도 결국 어린아이 같은 연습 과정을 건너뛸 수는 없는 사람인 것이다. (289~290.p)
Study for the Dome of Saint Peter’s Basilica (recto); Study for a niche and a Crucified Christ (verso)
아쉽게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미지가 없다.
7. 피에타와 예수의 매장 구도 스케치 (피에타 론다니니를 위한 다섯 가지 연구)
8. 론다니니 피에타
나는 돔 그림이 있는 방에서 나와 그가 노년에 진행한 또 다른 프로젝트였지만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했던 피에타상의 스케치를 찾아나선다. 종이 한 장에 80대 노인의 떨리는 손으로 그린 다섯 점의 습작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작고 치열하며 솔직한 느낌의 그 그림들에서는 그가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라고 의식을 한 흔적은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80대에 접어들어서도 미켈란젤로는 사소한 실수로 성 베드로 성당의 완공이 늦어지게 된 일로 크게 자책했다. “수치심과 슬픔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라고 그는 당시를 기록했다. 다섯 점의 스케치 중 두 점은 그가 결국 만들어낸 조각과 비슷하다. 수직으로 서 있다시피 하는 숨을 거둔 예수와 그이 무거운 시신을 받치고 있는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다. 미켈란젤로는 처음에는 듬직한 근육질로 예수의 몸을 조각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돌을 깎아나가 마침내 수척하고 쪼그라들어서 묘하게 현대 인상파 조각 느낌이 나는 예수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1490년대에 제작된 그의 ⟨피에타⟩가 거장의 명성에 걸맞는 걸작이라면 이 ⟨론다니니 피에타⟩에서는 고통과 내밀한 슬픔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292.p)
Five studies for the Pieta’ Rondanini ㅍ
Pieta Rondanin
론다니니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1552년부터 1564년 생애의 마지막 날까지 작업한 대리석 조각입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세 가지 버전이 있었으며 이것이 마지막 버전입니다.
이 글 보면서 잘 읽고 있었는데 12장이 마지막이네? ㅠㅠ 하면서 업로드 날짜를 보니 2일전..! 최근까지 업로드하고 계셨던 거네요. 나머지 13장은 직접 찾아보며 읽어야겠어요 ㅎㅎ 요약 정리랑 작품들 참고하며 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책 읽으면서 작품 볼 수 있었어요. 마치 미술관에 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